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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무예의 역사

전은미 | 기사입력 2015/11/23 [16:20]

장백무예의 역사

전은미 | 입력 : 2015/11/23 [16:20]


 

장백무예 3.JPG


 

유구한 역사를 지닌 어느 민족, 국가라도 각기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지키고 있기 마련으로, 무예(武藝)도 그러하다. 무예란 필수불가결한 “생존기술”이오 “번영수단”이면서 “문화”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통 무예는 민족 고유의 독특한 개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전쟁은 파괴와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나, 각기 고유한 문물이 교류되고 문화가 뒤섞여 문명(文明)발달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크고 작은 전쟁과 전투를 겪으면서 “전투기술” 역시 교류되기 마련이니 무술도 끊임없이 보완 개선되며 발전되어 왔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를 거쳐 고려까지 일부나마 이어져 내려오던 한민족 전통 무예를 북방무예(고구려무예 또는 장백무예)라 한다. 


이 북방 무예는 지리적으로, 중심점을 지금의 백두산으로 하고 북으로는 만주벌판(현 중국 동북삼성)의 흥안령 산맥과 장백 산맥에 걸치고, 남으로는 마천령 산맥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고구려 / 발해의 전성기 지역 포함)에서 고조선 이전부터 자생되어 발전된 무예를 총칭한다.

 

여러 한민족 전통 무예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고, 제일 강용하였으며, 그 분야도 넓고 종목도 다양했다. 이 무예가 있었기에 오랜 세월 거대한 중국 통일 국가들과도 동등하게 겨루며 온갖 침략을 격퇴하고, 오히려 그 와중에 국토를 확장할 수 있었으며, 평등한 외교도 가능했다.

 

과거 냉병기 시대에는, 아무리 오묘하고 훌륭한 전술·전략도 군병(軍兵) 각 개인이 지닌 무공(武功)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제대로 소화될 수 있는 것이며 그 효능의 발휘 범위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우리 한민족 북방무예를 중국 무술계에서는 ‘장백파(長白派)’ 라 칭하며, 수많은 중국 무술 문파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구대정대문파(九大正大門派)-소림/무당/곤륜/아미/공동/천산/황산/화산/장백-의 하나로 추대하고 존경하였다.


중국 무림의 그 자존심 높은 중화사상에도 불구하고 장백파(長白派)는 관외제일문파(關外第一門派)“라 존칭할 정도였고, 중원무림(中原武林)의 맹주격인 소림방장(小林方丈)도 장백장문(長白掌門)을 동등한 예로써 응대하였다. 이러한 한민족 북방무예는 중국 일본 등 인근 국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반도 남방의 신라의 화랑제도 창설에도 크게 작용했고, ‘태견’과 ‘상박’ 등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장백무예는 우리 한민족 여러 전통무예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됐으며, 그 안의 내용과 범위가 중국의 소림무예 분야와 버금갈 만큼 풍부하고 다양하며, 그 실용적인 면에서 높은 효율성과 위력의 막강함은 단연 발군이다.


또한, 참다운 호연지기를 배양하여, 올바른 민족정기를 확립해서 훌륭한 민주국가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중국무림에서는 예부터 장백문파(長白門派)를 평하기를 “기이(奇異)하고 오묘한 검법(劍法)에 능하며, 선악 분별이 명확하고 공명정대(公明正大)한 군자(君子)의 기풍이 있고, 세속(世俗)일에 초연해서 작은 시비(是非)에 관여하지 않은 은자적(隱者的) 기질이 있는 참된 정대문파(正大門派)”라고 칭송하여 왔던 것이다.

 

초대 대한전통무학회 회장이셨던 故 해암(海岩) 조영준(趙英俊) 선생님이 평소에 하신 말씀과 글을 정리하여 소개합니다. 조영준 선생님은 만주 동북군 특수부대에서 무술교관을 역임하기도 한 장백무예 73대 전인인 왕상운(王詳雲) 노사와 선친인 조명성(趙明聖) 경희대 한의과 교수, 그리고 중국 길림 장백산 출신의 구부악(邱富岳)노사를 통해서 장백무예를 전수받아 74대 전인이 되셨습니다. 현재 75대 전인들이 장백무예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자료제공 : 한맥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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